마케팅의 대상이 바뀐다
사람에서 에이전트로, 설득에서 구조로 — 마케팅의 근본 전제가 무너지고 있다.
1. 수십 년간 바뀌지 않은 하나의 공식
마케팅에는 오랫동안 하나의 전제가 있었다. 사람이 직접 보고, 비교하고, 선택한다는 것. 이 전제 위에서 우리는 노출을 설계했고, 클릭을 유도했고, 전환을 만들어냈다. 배너 하나의 카피를 열두 번 고쳐 쓰고, 랜딩페이지 버튼 색깔을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꿨다가 다시 되돌리고, CTA 문구 하나를 수정해서 전환율 0.3%를 끌어올렸을 때 팀 전체가 환호하던 — 그런 일상이 이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채널은 끊임없이 변했다. TV에서 배너로, 배너에서 검색으로, 검색에서 피드로, 피드에서 숏폼으로. 그러나 뼈대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주목을 끌고, 그 주목을 클릭으로 전환하고, 클릭을 행동으로 연결한다. 마케팅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이 한 줄짜리 공식의 수십 년간의 변주였다.
그런데 지금, 이 공식의 첫 번째 전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직접 본다는 전제.
2. 광고를 볼 이유가 없는 존재의 등장
하나의 장면을 떠올려 보자. 출장 항공권을 예약하는 상황이다. 지금이라면 검색을 하고, 스카이스캐너에 들어가 날짜를 입력하고, 여러 항공사의 가격을 비교하고, 후기를 확인하고, 잠시 고민하다 결제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배너 광고도 보고, "최저가 보장" 문구에 한 번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마일리지 적립 팝업을 닫기도 한다. 이 모든 접점이 마케팅이 작동하던 공간이었다.
이제 에이전트가 이 과정을 대신한다고 해보자. 에이전트는 검색창에 무언가를 입력하지 않는다. 비교 사이트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각 항공사의 API에 직접 접속해 가격, 좌석, 환불 조건, 정시 출발률 데이터를 수백 밀리초 만에 수집한다. 비교 페이지가 필요 없다. 후기를 읽지 않는다. 조건에 맞는 최적의 선택지를 고르고, 곧바로 결제를 실행한다.
핵심은 에이전트가 광고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광고가 끼어들 경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광고가 필요한 이유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다. 첫째, 사람은 세상의 모든 선택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이런 것도 있다"고 알려줘야 한다. 둘째, 사람은 논리보다 감정에 의해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광고가 그 감정을 건드린다. 에이전트에게는 이 두 조건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서비스 정보에 직접 접근할 수 있고, 감정이라는 변수가 없다.
이것은 채널의 변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전환이다. TV에서 모바일로 넘어갔을 때도 화면 너머에는 여전히 사람이 있었다. 시선이 있었고, 감정이 있었고, 망설임이 있었다. 에이전트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조건에 부합하면 선택하고, 아니면 다음으로 넘어간다.
결국 이것은 마케팅의 소멸이 아니다. 마케팅이 설득해야 할 대상이 사람에서 에이전트로 이동하는 것이다. 감정을 움직여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 "이 서비스를 사용해도 안전한가, 반복 실행해도 문제가 없는가"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시스템을 상대해야 한다.
3. 설득이 아닌, 구조의 시대
대상이 바뀌면, 당연히 방식도 바뀐다.
지금까지 마케팅의 핵심 질문은 "왜 우리를 선택해야 하는가"였다. 모든 광고, 모든 브랜딩, 모든 콘텐츠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기 위해 존재했다.
에이전트 시대에는 질문 자체가 달라진다. "선택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상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것이 마케팅의 새로운 중심 질문이 된다.
에이전트가 서비스를 평가할 때 참조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API 응답 속도가 200ms 이하인가. 지난 30일간 에러율이 0.1% 미만인가. 결제 실패 시 자동 롤백이 가능한가. 다른 에이전트들이 이 서비스를 반복적으로 호출하고 있는가. 감성적인 브랜드 영상은 에이전트에게 존재하지 않는 파일이다. 정성 들여 쓴 카피는 파싱할 필요가 없는 텍스트일 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생긴다. 사람에게 "반복"은 곧 지루함이다. 같은 광고를 세 번만 보면 스킵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에이전트 세계에서 반복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한 서비스가 1,000번 호출되었는데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지루한 서비스가 아니라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서비스다. 사람이 지루해서 떠나는 바로 그 지점이, 에이전트에게는 더 이상 판단이 필요 없는 최고의 신뢰 등급이 된다.
4. 이미 시작된 전환
이 변화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진행 중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에이전트의 등장"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ChatGPT에게 "서울 2박 3일 여행 코스"를 요청해 본 적이 있는가. Perplexity에 "노이즈캔슬링 이어폰 추천"을 물어본 적은. 그 순간, 검색도 비교도 후기 탐색도 이미 AI에게 넘어간 것이다. 네이버에 들어가지 않았고, 블로그를 스크롤하지 않았고, 광고를 보지 않았다. 아직 결제까지 대신하지는 않지만, 의사결정의 앞단 절반은 이미 에이전트의 영역이 되었다.
본격적인 전환은 2026년에서 2028년 사이에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에이전트가 추천을 넘어 예약과 구매, 구독의 실행까지 연결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특히 반복 구매나 SaaS 구독처럼 의사결정 패턴이 명확한 영역에서 먼저 나타날 것이다. 그때쯤이면 "광고 CTR이 몇 퍼센트인가"라는 질문은 "API 호출 성공률이 몇 퍼센트인가"로 대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후에는 마케팅 조직 자체가 재편된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옆에 API 아키텍트가 앉고, 미디어 바잉 대신 에이전트 호환성 테스트가 캠페인의 핵심 체크리스트가 되는 구조. 물론 모든 산업에 동시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B2B SaaS, 여행, 금융처럼 데이터 기반의 비교가 가능한 영역이 먼저 전환되고, 패션이나 식음료처럼 감성과 경험이 중심인 영역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동일하다. 에이전트가 판단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곳부터, 순서대로 전환이 진행된다.
5. 마케터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는다, 상승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하나의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케터는 무엇을 하게 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역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승한다. 에이전트가 실행을 가져갈수록, "무엇을 실행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의 비중은 오히려 커진다. 에이전트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다. 누군가 "이것을 최적화하라"고 지시해야 움직인다. 그 "이것"을 정의하는 것이 앞으로 마케터의 핵심 역할이다.
지금 준비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에이전트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다. API 구조, 메타데이터, 스키마 마크업, 신뢰도 시그널. 코드를 직접 작성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는 알아야 한다. 사람에게 랜딩페이지가 첫인상이었다면, 에이전트에게는 API가 첫인상이다. 그 첫인상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마케터가 에이전트 시대의 전략을 설계하기는 어렵다. 현재 이 영역을 이해하는 마케터는 극소수다. 지금 시작하면 그 자체로 강력한 차별점이 된다.
둘째, 캠페인이 아닌 시스템 단위로 사고하는 것이다. 하나의 광고를 잘 만드는 능력보다, 전체 흐름을 하나의 구조로 설계하는 시야가 필요해진다. 퍼널 전체를 펼쳐 놓고, 어디서 에이전트가 작동하고 어디서 사람의 판단이 개입해야 하는지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앞으로의 마케팅 리더의 조건이다.
셋째, 역설적이지만 가장 인간적인 영역을 더 깊이 다루는 것이다. "이 브랜드는 무엇을 대변하는가",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 멈출 것인가", "무엇이 가치 있는 목표인가." 이것은 에이전트가 대신할 수 없는 판단의 영역이다. 에이전트는 최적화에는 탁월하지만, 무엇을 최적화할 것인지를 정하지는 못한다. 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사람이고, 그 사람이 마케터다.
6. 새로운 게임의 규칙
마케팅은 더 이상 주목을 사는 게임이 아니다. 반복 실행이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게임이다.
화려한 캠페인 한 번이 아니라 조용한 신뢰의 축적이, 한 번의 바이럴이 아니라 천 번의 안정적인 반복이 승부를 가르는 시대가 오고 있다. 완전히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가까워졌다.
마케팅의 대상이 바뀌고 있다. 이 전환을 먼저 읽는 사람이, 다음 시대의 규칙을 쓰게 될 것이다.
🔗 Sources
| # | 출처 | 설명 |
|---|---|---|
| 1 | Attention Economy — Wikipedia | "주목을 끌고, 클릭으로 전환" 구조의 경제학적 배경 |
| 2 | Search Engine Optimization — Wikipedia | SEO 개념 — 에이전트 시대 AEO와의 대비 |
| 3 | Model Context Protocol — Wikipedia | AI 에이전트가 서비스에 접속하는 프로토콜 표준 |
| 4 | Skyscanner | 항공권 비교 플랫폼 — 본문 예시 |
| 5 | ChatGPT — OpenAI | AI 기반 대화형 검색 — 에이전트 전환의 현재 사례 |
| 6 | Perplexity AI | AI 기반 검색 엔진 — 의사결정 앞단의 에이전트화 사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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