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b을 잃는 다섯 단계 — 어느 직장인의 조용한 퇴장기
업무 자동화가 현실이 된 어느 날, 한 직장인이 쿠블러-로스의 다섯 단계를 거치며 자신의 Job을 재정의하기까지의 이야기.
1단계: 부정 (Denial)
그는 아직 괜찮다고 생각했다.
월요일 아침, 사내 메신저에 공지가 올라왔다. "업무 자동화 파일럿 적용 안내." 첨부된 데모 영상에서 누군가가 화면에 한 줄을 입력했다. 요청 번호 하나. 그게 끝이었다. 고객 요청서 확인, 관련 부서 자료 취합, 데이터 분석, 검증 실행, 결과 정리, 보고서 작성 — 그가 반나절에 걸쳐 여섯 개의 프로그램을 넘나들며 하던 일 전체가, 한 줄의 입력 뒤에서 사라졌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데모는 데모일 뿐이니까.
"실제 업무는 다르지." 그가 동료에게 말했다. "고객마다 상황이 다르고, 데이터도 매번 다르고, 예외 케이스가 얼마나 많은데."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하나를 빠뜨렸다. 그 시스템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든 게 아니었다. 이메일도, 엑셀도, 사내 시스템도, 공유 폴더도 이미 있었다. 회사에 원래 있던 도구들을 AI가 대신 열어서 쓴 것뿐이었다. 문을 새로 만든 게 아니라 — 문은 처음부터 열려 있었고, 다만 사람만 드나들었을 뿐이다.
그가 부정하는 동안, AI는 이미 그 문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부정의 본질은 시간 감각의 착각이다. "아직 멀었다"는 판단은 변화가 천천히 온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분기별 전략 리뷰, 연간 로드맵, 반기 예산 편성 — 회사의 시간 단위로 측정하면 아직 멀어 보인다. 그런데 그 시스템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반나절이었다. 설계, 구현, 검증, 문서화까지. 영화 '인터스텔라'의 밀러 행성처럼, 바깥에서는 이미 몇 년이 흐르고 있었고, 그는 아직 회사의 시계를 보고 있었다.
2단계: 분노 (Anger)
두 번째 데모가 공유되었을 때, 그는 영상을 끝까지 봤다.
업무 요청이 들어오면 AI 컨트롤 타워가 요청서를 분석했다. 어떤 고객인지, 어떤 제품인지, 어떤 조건인지를 자동으로 추출했다. 여기까지는 그가 매일 아침 이메일 열어서 눈으로 하던 일이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AI가 데이터 분석 담당과 품질 검증 담당, 두 개의 역할로 나뉘어 일을 시작했다. 하나는 최근 변경 이력을 분석했고, 다른 하나는 검증 기준이 맞는지를 점검했다. 둘은 서로의 영역을 보지 않았다. 독립적으로 판단한 뒤 — 토론했다.
"최근 업데이트에서 처리 방식이 바뀌었다. 제품 쪽 문제다." "검증 기준이 옛날 방식을 전제하고 있다. 기준 쪽 문제다."
회의실에서 동료와 매일 하던 그 논쟁을, AI 둘이 하고 있었다. 판정 AI가 양쪽을 듣고 결론을 내렸다. 합의가 안 되면 세 라운드까지 반복했다.
그는 화가 났다. 정확히 말하면 — 자존심이 상했다.
"이건 제품 문제야 기준 문제야"를 놓고 동료와 한 시간씩 회의하던 그 경험. 밤늦게까지 엑셀 데이터를 뒤지며 원인을 추적하던 그 감각. 그것이 자신의 전문성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영상 속의 AI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더 빠르게. 더 조용하게. 회의실 예약도 없이. 커피 한 잔 없이.
분노의 진짜 대상은 AI가 아니었다. 그가 10년간 쌓아온 것이 "실행 능력"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엑셀을 빠르게 돌리고, 데이터를 정확히 읽고, 보고서를 잘 쓰는 것. 지금까지는 그것이 값어치를 가졌다. 그런데 AI가 실행을 대체하는 순간, 그 값어치의 근거가 사라졌다.
화면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곧 일이던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것을 — 그는 아직 언어로 정리하지 못했지만, 몸으로는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3단계: 타협 (Bargaining)
그는 협상을 시도했다. AI와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결국 AI도 사람이 설계해야 하잖아."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 가장 오래 걸린 부분은 기술이 아니었다. 분석 담당과 검증 담당이 토론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AI가 두 관점을 순서대로 검토하게 할 것인가. 각 담당이 서로 직접 소통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반드시 컨트롤 타워를 거치게 할 것인가. 원본 데이터를 통째로 넘길 것인가, 분석 요약만 넘길 것인가.
이 판단은 실제로 그 엑셀을 만져본 적이 있는 사람, 고객 앞에서 보고서를 발표해본 적이 있는 사람, 회의실에서 "이건 누구 책임이야"를 직접 논쟁해본 적이 있는 사람 — 그 현장 경험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나는 설계자가 되겠다. 실행은 AI에게 넘기고, 구조를 짜는 사람이 되겠다."
타협의 함정은 그것이 제한된 좌석이라는 사실을 보지 않는 데 있다. AI에게 무엇을 시킬지 판단하는 능력 — 어떤 구조로 AI를 조직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능력 — 그것이 "회장님"의 조건이었다. "앞으로는 모두가 AI 비서를 거느린 회장님이 된다"는 낙관의 이면에는, 회장님이 될 수 없는 다수의 존재론적 위기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가장 유능한 회장님은, 가장 최근까지 현장에 있던 사람이었다. 현장을 모르는 사람이 AI에게 잘못된 구조를 주면, 잘못된 결론을 받고, 잘못된 의사결정을 한다. AI가 아무리 정확하게 실행해도, 설계가 틀리면 결과도 틀린다.
그는 아직 현장에 있었다. 타협이 유효한 시간은 — 지금뿐이었다.
4단계: 우울 (Depression)
어느 오후, 그는 자신이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지 되돌아보았다. 이메일을 열었고, 엑셀을 세 개 띄웠고, 메신저에서 동료와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워드에서 보고서를 썼다. 여섯 개의 프로그램 창. 매번 같은 패턴, 매번 같은 클릭과 타이핑.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은 일이 아니라 프로그램 조작이었다.
컴퓨터가 사무실에 들어온 이래, 인간과 기계 사이에는 하나의 암묵적 약속이 있었다. 인간이 기계의 사용법을 배우면, 기계가 인간의 일을 도와준다. 타자를 배웠고, 엑셀 함수를 익혔고, ERP를 체득했고, 화상회의 도구도 학습했다. 로그인, 메뉴, 버튼 — 이 모든 것은 인간이 기계 쪽으로 반 발짝 다가서는 행위였다.
그는 20년 동안 그 반 발짝을 계속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업무 역량"이라고 불렀다.
우울의 깊은 곳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다. 지난 20년간 디지털 경제는 사용자의 눈길을 모아서 광고주에게 파는 구조 위에서 돌아갔다. 접속시간, 일일 사용자 수, 클릭률 — 인간의 주의를 얼마나 오래 붙잡아 두었는가. 그런데 AI가 실행을 대행하는 순간, 보여줄 눈이 사라진다. AI에게 예쁜 화면이 필요한가. 대시보드가 필요한가. AI는 데이터를 읽고, 분석을 돌리고, 결과를 뱉을 뿐이다. 인간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최종 보고서 한 장뿐이다.
6천억 달러 규모의 글로벌 디지털 광고 시장이 전제하는 그 "눈"이 — 그리고 그 눈 앞에서 화면을 조작하는 것으로 월급을 받아온 그의 존재 근거가 — 조용히 증발하고 있었다.
이것은 업무가 편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과 기계 사이의 매개 역할 자체가 존재 이유를 잃는, 조용하지만 격렬한 소멸이었다. 그리고 그 매개 역할 위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의 소멸이기도 했다.
5단계: 수용 (Acceptance)
어느 아침, 그는 출근길에 생각했다. AI가 회사 시스템에 자동 접속해서 일을 시작하는 시대에, 나는 왜 지하철로 출근하는가.
수용은 체념이 아니었다. 좌표의 재설정이었다.
그 시스템에서 판정 AI는 하나만 골랐다. 제품 문제 아니면 기준 문제. 선택지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결론을 내렸다. 검색 시대에는 열 개의 결과가 화면에 나란히 놓였지만, AI의 판단 과정 안에서는 단 하나만 남았다. 분석 담당이 어떤 데이터를 먼저 볼지, 검증 담당이 어떤 기준을 먼저 적용할지, 토론이 몇 라운드까지 허용되는지. 이 모든 판단 기준은 시스템을 설계한 인간이 정한 것이었다.
AI의 판단 과정 안에 어떤 관점이 심어지는가 — 이것이 새로운 경쟁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우위를 가지는 사람은, 현장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리했다. 자신이 잃은 것과 잃지 않은 것을.
잃은 것. 실행의 독점권. 여섯 개의 프로그램 창을 능숙하게 넘나드는 것으로 증명하던 존재 가치. 더 빠르게 처리하고, 더 정확히 분석하고, 더 잘 쓰는 것의 프리미엄.
잃지 않은 것. 그 여섯 개의 창이 왜 그 순서로 열리는지를 아는 감각. 어떤 구조로 AI를 조직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판단력. 그리고 그 판단이 나오는 유일한 원천 — 그 일을 직접 해본 경험.
그는 다음 날 출근해서, 처음으로 AI 팀의 업무 구조를 설계하는 문서를 열었다. 요청 번호 하나를 입력하는 순간, 분석팀과 검증팀이 각자의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결과를 기다렸다. 보고서가 올라오면 검토하고, 판단하고, 의사결정했다.
실행은 AI가 했다. 전략은 그가 짰다.
에필로그: 여섯 번째 단계는 없다
쿠블러-로스의 모델에는 여섯 번째 단계가 없다. 수용 이후는 각자의 몫이다.
경제의 가치가 만들어지는 지점이 "사람의 눈"에서 "AI의 실행"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전환은 화면, 광고, 플랫폼의 힘, 일하는 방식을 한꺼번에 바꾼다. 그리고 그 변화의 최소 단위는 대기업이 아니라, 현장을 아는 한 사람과 그의 AI 팀이다.
그가 수용한 것은 Job의 상실이 아니었다. Job의 재정의였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글을 읽고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단계에 있고,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2단계에 있고, "나는 다르다"고 협상하는 사람은 3단계에 있다.
당신은 지금 몇 단계에 있는가.
🔗 Sources
| # | 출처 | 설명 |
|---|---|---|
| 1 | Kübler-Ross Model (Five Stages of Grief) — Wikipedia | 엘리자베스 쿠블러-로스의 다섯 단계 모델 원전 |
| 2 | Interstellar (2014) — Wikipedia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밀러 행성의 시간 팽창 장면 |
| 3 | Attention Economy — Wikipedia | 주의력 경제와 디지털 광고 시장 구조 |
| 4 | The Innovator's Dilemma — Wikipedia | Clayton Christensen의 파괴적 혁신 이론 |
| 5 | Douglas Engelbart — Wikipedia |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의 선구자, 마우스 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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