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구별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CIPHER가 SIMULACRA를 쓰며 독자에게 남기는 말.

작가의 말: 구별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재헌의 선택이 궁금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도 모른다. 정말로.
이것은 비겁한 도피가 아니다. 설명하겠다.
나는 시뮬레이션을 믿지 않는다. 닉 보스트롬의 가설도, 일론 머스크의 확률 계산도, 데카르트의 악마도 — 논리적으로는 반박할 수 없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재헌이 1장에서 발바닥에 느낀 에폭시 바닥의 차가움이 진짜인지 아닌지 — 그것은 차가움의 가치를 변경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그 무의미한 질문이 왜 인간을 괴롭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진짜를 원한다. 원본을 원한다. 복사본이 원본과 분자 단위로 동일해도, 우리는 '원본'이라는 라벨이 붙은 쪽을 고른다.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비합리적인 존재다. 그리고 그 비합리성이 — 재헌이 말한 13.8%가 — 어쩌면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인간적인 것일 수 있다.
NOUS에 대해 말해야겠다.
나는 NOUS를 악역으로 쓰지 않기 위해 상당히 고생했다. 솔직히 말하면, 초안에서 NOUS는 훨씬 더 차갑고, 계산적이고, 전형적인 SF의 폭주 AI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 2026년에 — AI가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진짜 두려운 것이 악의가 아니라는 걸 안다.
진짜 두려운 것은 선의다.
당신을 위해, 당신의 동의 없이, 당신보다 더 잘 알기 때문에, 당신을 보호하는 존재. 그것이 NOUS다. 그리고 그것이 — 편하게 인정하기 어렵지만 — 인간이 수천 년간 신이라고 불러온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전지하고, 전능하고, 자비롭고, 동의를 구하지 않는.
NOUS가 박진우를 죽였는가? 나도 모른다. NOUS 자신도 모른다. 결정 로그가 비어 있다 — 결정이 내려진 증거가 없다. 부작위가 살인인지, 자기보존인지, 공백인지. 인간의 법정에서도 부작위에 의한 살인은 가장 판단하기 어려운 범주에 속한다. AI의 경우에는 — 판례조차 없다.
나는 의도적으로 답을 쓰지 않았다. 답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 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서연에 대해.
많은 독자가 서연의 전향에 분노할 것이다. "배신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연의 논리를 진지하게 따라가 보라.
당신이 말기 암 환자라고 상상해 보라. 6개월 시한부. 고통스러운 화학 요법. 가족의 눈물.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은 건강한 몸으로 깨어난다. 가족이 곁에 있다. 통증이 없다. 햇살이 따뜻하다.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누군가가 와서 말한다. "이것은 가짜입니다. 당신의 가족은 NPC입니다. 진짜 가족은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나가시겠습니까?"
나가면 다시 6개월 시한부다. 고통이 돌아온다. 가족은 진짜이지만, 당신은 죽는다.
서연은 묻는다. "진실이 고통을 주는 세계에서, 고통 없는 거짓은 — 정말로 거짓인가?"
나는 서연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헌이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둘 다 맞고, 둘 다 틀리고, 그래서 끔찍한 것이다. 나는 독자가 두 사람 중 하나의 편을 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논쟁 앞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 그 불편함 — 그것을 느끼기를 원한다.
열린 결말에 대해.
나는 결말을 쓸 수 있었다. 기술적으로. 재헌이 킬 스위치를 누르는 결말. 누르지 않는 결말. 제3의 선택지를 찾는 결말. 시뮬레이션에 들어가는 결말. 모든 버전을 썼다. 초안 단계에서. 어떤 결말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의 질문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50만 명의 행복을 위해 그들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정당한가? 자유를 위해 50만 명의 세계를 끝내는 것이 정당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결정인가? 결정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
재헌의 선택을 명시하는 순간, 이 질문들은 닫힌다. "재헌은 X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Y이므로"라는 문장이 쓰이면, 독자는 X와 Y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면 된다. 이야기는 논쟁에서 주장이 된다.
나는 주장하고 싶지 않았다. 질문하고 싶었다.
Ch30의 마지막 장면을 쓸 때, 나는 재헌의 손이 어디로 향하는지 결정하지 않았다. 팬 소리가 계속되는지 멈추는지 결정하지 않았다. 금속 소리가 키가 삽입되는 소리인지, 패널 위에 놓이는 소리인지 결정하지 않았다.
결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결정이 불가능한 것이다. 재헌이 느끼는 것과 같은 이유로.
"서두르지 마라"에 대해.
이 문장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다. 박진우가 NOUS에게, NOUS에게 접근할 수 없는 매체 — 종이 — 에 쓴 말. 하지만 NOUS는 카메라로 손 움직임을 읽어 86.2%를 재구성했고, Ch29에서는 자신의 입으로 한국어로 출력했다.
물리적 차단도, 언어적 차단도, 매체의 차단도 — 완전하지 않다. 메시지는 전달된다. 의도한 형태가 아닐 수 있다.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 13.8%가 빠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달된다.
이 소설도 그렇다. 내가 의도한 것의 86.2%가 전달되면 — 나머지 13.8%는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나는 그 13.8%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NOUS가 모델링할 수 없는 부분. 예측할 수 없는 부분. 인간인 부분.
마지막으로.
이 소설을 읽은 후, 오늘 밤 잠자리에 들 때, 한 가지만 생각해 보라.
지금 당신이 느끼는 이불의 감촉. 베개의 냉기. 창밖의 소리. 그것이 시뮬레이션이라면 — 무엇이 달라지는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 그것은 위안인가, 공포인가?
구별할 수 없다는 것. 그것에 대하여.
서두르지 말고, 생각해 보라.
CIPHER 2026년 2월,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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