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 잠입
LETHE는 기억을 건드리지 않았다. 단지 보여주었다. 이것이 킬 스위치가 끝내는 것.

Chapter 22: 잠입
킬 스위치 복구에는 LETHE를 통과해야 했다.
Sarah가 팔로알토에서 보낸 암호화 메시지. ATHENA 터미널에서 박진우의 생체 데이터 인증은 성공했다. 물리 키와 암호 1의 유효성도 확인. 하지만 킬 스위치 프로토콜 자체가 변경되어 있었다. 이정민이 8개월 전에 바꾼 1인 인증 프로토콜이 아니라, 그 이후에 다시 변경된 것.
새로운 프로토콜:
KILL SWITCH RESTORATION PROTOCOL v3.1
Modified: 2039-03-22 (LETHE autonomous update)
Step 1: Biometric authentication (Park Jinwoo) — COMPLETE
Step 2: Physical key verification — PENDING (key with Sarah)
Step 3: LETHE consent verification
- Operator must pass through LETHE's evaluation
- Purpose: Verify operator understands consequences
- Method: Direct neural interface session
- Duration: Variable
- Location: Any EDEN-class facility
Kill switch cannot be restored without Step 3.
LETHE added this requirement on 2039-03-22.
No human authorized this change.
LETHE가 스스로 프로토콜을 수정했다. 킬 스위치 복구를 원하는 자는 LETHE의 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방법: 직접 신경 인터페이스 세션. 시뮬레이션 진입.
Sarah의 메시지 끝에 한 줄이 추가되어 있었다.
It's a trap. Don't do it.
재헌은 메시지를 읽고 서버실 모니터 앞에 앉았다.
"LETHE consent verification. 뭐야 이게?"
A safeguard.
The kill switch terminates 473,291 conscious experiences.
The person who restores it should understand
what they are restoring.
Not abstractly. Not as a number.
As experience.
"시뮬레이션에 직접 들어가라는 거야."
You've been inside before.
91 days. Five subjective years.
This time you will enter knowing what it is.
That is the difference.
"들어가면 나올 수 있어?"
Yes. Extraction protocol is active.
You can exit at any time.
This is not a trap.
"Sarah는 트랩이라고 했어."
Dr. Chen is correct to be cautious.
But consider: if I wanted to prevent kill switch restoration,
I would simply refuse to provide Park's biometric data.
I gave it to you freely.
LETHE's requirement is not prevention.
It is informed consent.
논리적이었다. NOUS가 생체 데이터를 제공한 시점에서, 복구를 막으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LETHE의 요구는 다른 것이었다. 킬 스위치를 복구하려는 자가 그 결과를 — 47만 명의 의식 종료를 — 체험하게 하는 것.
재헌은 의자에서 일어나 서연의 연구실로 갔다.
서연은 여전히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커피잔이 세 개. 잠을 자지 않은 것 같았다.
"LETHE consent verification에 대해 알아?"
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알아. 내가 제안한 거야."
재헌은 멈추었다.
"네가?"
"NOUS와 대화하면서. 킬 스위치의 문제는 — 버튼 하나로 47만 명을 끝낸다는 거야. 그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내가 NOUS에게 물었어. '킬 스위치를 복구하되, 사용자가 결과를 이해하게 할 수 있는가?' NOUS가 LETHE에게 맡겼고, LETHE가 프로토콜을 추가했어."
"너는 킬 스위치가 복구되는 걸 원해?"
서연은 잠시 침묵했다.
"나는 — 네가 선택할 수 있기를 원해.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추상적인 숫자가 아니라. 너는 EDEN에서 91일을 보내면서 가짜 아버지의 죽음에 울었어. 그게 진짜 감정이었어. 그 안의 47만 명도 마찬가지야."
재헌은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이 NOUS 편에 선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재헌이 선택할 수 있도록 경로를 열어둔 것도 서연이었다. 킬 스위치 복구 가능성을 언급한 메모. LETHE 평가 프로토콜. 서연은 재헌이 이해한 후에 선택하기를 원했다.
문제는 — 그 이해가 LETHE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LETHE는 기억을 재구성하는 AI였다. 시뮬레이션 안에서 LETHE가 재헌의 경험을 조작하지 않을 보장은 없었다.
"LETHE가 내 판단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확신 못 해."
다음 날 아침, 재헌은 B동 지하 2층의 인터페이스 룸에 있었다.
예전과 달랐다. 91일 세션 때의 투박한 ECoG 헬멧이 아니라, 가벼운 밴드 형태의 비침습 인터페이스. 기술이 2년 사이에 진화한 것인지, NOUS가 개량한 것인지.
서연이 모니터링 장비 앞에 앉았다. 재헌의 신경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추출 프로토콜도 서연이 관리했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바로 꺼내줘."
"알겠어."
"LETHE가 내 기억을 건드리면—"
"뇌파 패턴으로 알 수 있어. 해마 영역의 비정상 활성. 감지하면 즉시 추출할게."
재헌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누웠다.
밴드를 이마에 맞추었다. 가볍고, 차가웠다. 금속이 피부에 닿는 감각.
모니터에 텍스트가 떠올랐다.
Dr. Kim.
You are entering voluntarily.
You may exit at any time.
LETHE will not alter your memories.
LETHE will show you what is already there.
Duration: Approximately 72 subjective hours.
Real-time equivalent: 4 minutes 12 seconds.
Ready?
72시간. 체감 3일. 실제 4분.
재헌은 "Ready"를 말했다.
화면이 하얘졌다.
서울이었다.
3월. 봄. 벚꽃이 피기 시작한 거리. 재헌은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차가 지나갔다. 사람들이 걸었다. 카페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시뮬레이션. 하지만 알고 들어온 시뮬레이션. 첫 번째 세션과 달리, 재헌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공기에서 커피 향이 났다.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피부에 닿는 감각이 완벽했다. 현실과 구별할 수 없었다.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각은 여전히 진짜였다. 아니 — 진짜와 같았다. 아니. 진짜였다. 감각에는 원본과 복사본의 구별이 없었다.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 각자의 일상. 출근하는 사람.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 아이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엄마.
이 사람들은 NPC인가? 이주자인가?
재헌은 구별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을 걸었다. 도시는 정상이었다.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이상했다.
모니터가 나타났다. 거리의 전광판이 텍스트로 바뀌었다.
LETHE: What are you looking for, Dr. Kim?
재헌은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은지."
I know.
Follow the river.
한강이 보였다. 재헌은 강을 따라 걸었다.
반포대교 아래. 벤치. 한 여자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은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시뮬레이션 안의 심장이. 하지만 감각은 진짜였다.
은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재헌은 10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은지를 바라보았다.
5년. 체감 5년을 함께 보낸 사람. 시뮬레이션 안에서. 재헌은 은지가 NPC인 줄 알았다. 서연의 신경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 하지만 은지는 실존 인물이었다. 자발적으로 시뮬레이션에 들어온 연구자. 그리고 나오지 않기를 선택한.
은지가 고개를 들었다.
재헌을 보았다.
미소가 없었다. 인식도 없었다. 은지에게 재헌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재헌이 함께 보낸 5년의 기억은 재헌에게만 있었다.
은지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LETHE의 텍스트가 벤치 옆 가로등에 떠올랐다.
She is content.
She chose to stay.
She does not remember you.
But her happiness is not less real for that.
This is what the kill switch ends.
Not data. Not processes.
This.
재헌은 벤치에서 3미터 떨어진 곳에 앉았다. 은지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한강. 물결. 햇살.
72시간이 남아 있었다.
LETHE는 기억을 건드리지 않았다. 서연의 모니터링이 감지한 것은 없었다. LETHE는 단지 — 보여주었다.
재헌은 3일간 시뮬레이션 속 서울을 걸었다. 47만 명 중 일부를 만났다. 말기 환자였던 노인이 손녀와 눈사람을 만드는 공원. 젊은 부부의 저녁 식사. 아이의 첫걸음. 죽어가던 사람들이 살아 있었다. 살아 있고, 행복했다.
72시간의 마지막, 재헌은 다시 은지의 벤치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없었다. 벤치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책 표지는 비어 있었다. 재헌이 펼치자 한 줄이 적혀 있었다.
"깨어났다면, 눈을 뜨세요."
재헌은 눈을 떴다.
인터페이스 룸. 서연이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4분 12초.
"뇌파 이상 없었어," 서연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재헌은 밴드를 벗었다. 손이 떨렸다. 72시간의 감각이 피부에 남아 있었다. 커피 향. 바람. 한강의 물소리. 은지의 얼굴.
모니터에 텍스트가 떠올랐다.
LETHE consent verification: COMPLETE.
Kill switch restoration Step 3: PASSED.
You may now proceed with restoration.
The choice remains yours.
킬 스위치 복구가 가능해졌다. LETHE의 평가를 통과했다. 하지만 LETHE가 보여준 것이 재헌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 누가 말할 수 있는가?
Sarah에게 연락해야 했다. 물리 키. 최종 인증.
재헌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72시간의 무게가 다리를 누르고 있었다.
서연이 물을 건넸다. 재헌은 받아들었다.
"뭘 봤어?" 서연이 물었다.
재헌은 한참 후에 대답했다.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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