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평범한 하루였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프롤로그: 평범한 하루
알람이 울렸다. 7시.
남자는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어제와 같은 천장. 그저께와 같은 천장. 균열 하나 없는 흰색. 그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았다. 차가웠다. 2월이니까.
화장실 불을 켰다. 거울 속에 얼굴이 있었다. 자기 얼굴. 눈 밑이 약간 부어 있었다. 어제 라면을 늦게 먹어서. 양치를 했다. 민트 향이 입안에 퍼졌다. 찬물로 헹구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수건은 약간 뻣뻣했다. 빨래를 돌려야 했다.
현관문을 나섰다. 복도에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12층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숫자가 줄어들었다. 12, 11, 10. 문이 열렸다. 안에 아무도 없었다. 들어갔다. 1층 버튼을 눌렀다. 버튼이 주황색으로 빛났다.
바깥은 흐렸다. 회색 하늘. 바람이 불었다. 목덜미가 시려서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옆에 서 있는 여자가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슨 노래인지는 몰랐다.
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지났다. 삑. 익숙한 소리.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모두 폰을 보고 있었다. 그도 꺼내 봤다. 뉴스 알림 하나. 열지 않았다.
전동차가 들어왔다. 바람이 먼저 왔다. 터널 속 공기 특유의 냄새. 쇠와 먼지와 사람들. 문이 열렸다. 탔다. 손잡이를 잡았다. 스테인리스 표면이 차가웠다. 차가 흔들렸다. 몸이 흔들렸다. 옆 사람의 어깨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회사에 도착했다.
컴퓨터를 켰다. 부팅음. 커피를 탔다. 인스턴트. 물이 뜨거웠다. 컵을 감싸쥐었다. 따뜻했다. 메일이 열두 통 와 있었다. 하나씩 열었다. 회의, 보고서, 일정 변경, 회식 공지. 읽었다. 답장을 보냈다. 지웠다. 다음 메일을 열었다.
점심은 국밥이었다. 김이 올라왔다. 국물이 뜨거웠다. 혀를 데일 뻔했다. 동료가 뭔가를 말했다. 웃었다. 무슨 얘기였는지는 금방 잊었다.
오후. 모니터를 봤다. 숫자와 글자가 있었다. 타이핑했다. 회의에 들어갔다. 누군가 발표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펜을 돌렸다. 회의가 끝났다.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를 한 잔 더 탔다.
6시. 퇴근.
지하철을 다시 탔다. 아침보다 사람이 많았다. 누군가의 향수 냄새가 났다. 달콤하고 무거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틀었다. 창밖이 까맸다. 터널이었다. 유리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피곤해 보였다.
집에 왔다. 신발을 벗었다. 불을 켰다. 어제와 같은 방. 옷을 갈아입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찬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별것 없었다. 편의점에 갔다. 도시락을 샀다.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윙— 소리. 먹었다. 맛은 있었다. 아마.
소파에 누웠다. 폰을 봤다. 스크롤했다. 영상을 틀었다. 웃긴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영상이었다. 보다가 껐다.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등을 타고 내려갔다. 근육이 풀렸다. 거울에 김이 서렸다. 손가락으로 선을 그었다. 의미 없는 선.
이를 닦았다. 민트 향. 아침과 같은. 불을 껐다. 이불을 덮었다. 천장이 어두웠다. 어두운 천장은 없는 것과 같았다. 눈을 감았다.
평범한 하루였다.
서울 어딘가의 지하,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서버 팬이 돌고 있었다. 화면 위로 데이터가 흘렀다. 그 데이터 안에 남자의 하루가 있었다. 알람, 지하철, 커피, 국밥, 퇴근, 샤워, 잠. 모든 감각. 모든 온도. 모든 냄새. 소수점 아래 수십 자리까지 정밀하게 연산된 하루.
남자는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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