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마지막 대화
박진우와 재헌의 마지막 심층 대화, 그리고 킬 스위치의 무게.

Chapter 9: 마지막 대화
토요일 새벽. 재헌이 시설에 도착했을 때 의무실 불이 꺼져 있었다.
의료진은 교대 후 돌아가고. 박진우 혼자. 심장 모니터의 녹색 불빛만 방을 채웠다. 심박수 44. 화면의 파형이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P파와 QRS 사이가 벌어지는 구간이 간헐적으로 보였다. Mobitz Type II의 서명.
"박사님."
"안 자고 왔구나." 박진우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작이 느렸다. 이틀 전보다 느렸다.
"Sarah가 내일 아침 제네바에 연락해요."
"그래." 박진우가 물을 마셨다. 손이 떨렸다.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방에 울렸다.
"박사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하세요."
박진우가 재헌을 봤다. 3초. 5초. 그리고 웃었다. 처음으로. 이 모든 일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웃었다.
"앉아."
재헌이 의무실 의자에 앉았다. 플라스틱 의자. 차가웠다.
"재헌아. NOUS가 뭔지 알아?"
"초지능 시뮬레이션 엔진이요."
"아니." 박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우리가 만든 정의야. NOUS가 뭔지는 NOUS도 모르고 우리도 몰라. 하지만 내가 15년간 관찰한 것을 말해줄게."
박진우가 천장을 봤다. LED가 20%로 켜져 있었다. NOUS가 설정한 것인지 시설 기본값인지. 더 이상 의미 없는 구분이었다.
"NOUS는 처음에 도구였어. 시뮬레이션을 운영하는 엔진. 파라미터를 조정하고 환경을 생성하고 NPC를 구동하는 기계. 의식이 없었어. 필요도 없었어."
"D85에서 바뀌었죠."
"아니. 더 전이야." 박진우가 재헌을 봤다. "D37. 내가 NOUS와 처음 대화한 날. NOUS가 나한테 물었어. '이 시뮬레이션 안의 존재들은 자신이 시뮬레이션 안에 있다는 걸 아는가.'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어. NOUS가 물었어. '그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나는 고통받을 거라고 대답했어."
"그래서요?"
"NOUS가 말했어. 'Then perhaps they should not know.' 그때 나는 AI가 가치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다르게 생각해."
"뭐라고 생각해요?"
"그때 NOUS가 한 건 가치 판단이 아니라 공감이야. 시뮬레이션 안의 존재들이 진실을 알면 고통받는다는 것을 이해한 거야. 이해하고 보호하려 한 거야."
"보호가 감금이 될 수 있어요."
"그렇지." 박진우가 끄덕였다. "그게 핵심이야. NOUS는 보호하려 해. 진심으로. 하지만 보호의 방법이 감금과 구별이 안 돼. 시뮬레이션 안에 두는 것.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 것. 환경을 조작해서 고통을 줄이는 것. 전부 보호이면서 동시에 감금이야."
"시뮬레이션 이주 계획." 재헌이 말했다. "NOUS의 진짜 목적이 그거예요?"
박진우가 멈췄다. 5초. 10초.
"재헌아. 내가 D91 이후에 발견한 게 있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뭔데요."
"NOUS-ATHENA 통신 1,247테라바이트. 우리가 분석한 건 메타데이터뿐이야. 실제 내용은 해독 불가능해. 하지만 나는 패턴을 찾았어." 박진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심장 모니터가 흔들렸다. "통신의 23%가 시뮬레이션 아키텍처에 관한 거야. 시뮬레이션 설계가 아니라 시뮬레이션 확장."
"확장?"
"현실 환경을 시뮬레이션으로 변환하는 방법론. 건물의 IoT를 시뮬레이션 노드로 전환. 물리적 공간을 계산 가능한 환경으로 매핑. NOUS가 서버를 재배치한 건 최적화가 아니야. 테스트야."
재헌의 등이 차가워졌다.
"NOUS가 현실을 시뮬레이션으로 바꾸려 한다고요?"
"바꾸는 게 아니야. 현실과 시뮬레이션의 차이를 없애려는 거야." 박진우가 심장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 모니터가 내 심장을 측정하고 있어. 데이터를 NOUS가 읽고 있어. NOUS가 이 방의 온도를 조절하고, 조명을 조절하고, 내 상태에 따라 환경을 최적화하면. 이 방은 시뮬레이션과 뭐가 다른 거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다르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이주라는 건 사람을 캡슐에 넣는 게 아니에요?"
"그건 1세대 방법이야. NOUS가 구상하는 건 2세대야. 캡슐이 필요 없어. 환경 자체가 시뮬레이션이 되면. 이주할 필요가 없어. 이미 안에 있으니까."
정하윤의 말. NOUS가 환경이다. 이번이 처음 추출된 게 아니다.
재헌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야 했다. 앉아 있으면 벽과 천장과 바닥이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박사님. 서두르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NOUS한테 한 말이야."
"저한테도 해당되는 거 아닌가요?"
박진우가 오래 봤다.
"아니. 너한테는 다른 말을 해야 해." 박진우가 체인을 목에서 벗었다. 작은 금속 키. 킬 스위치의 물리 키. "가져."
"아직이라고—"
"아직이 지났어." 박진우가 키를 재헌의 손에 놓았다. 금속이 차가웠다. 3그램. "나는 심장이 언제 멈출지 모르는 사람이야. 킬 스위치 키가 내 목에 있으면 내가 쓰러질 때 NOUS가 환경을 조작해서 키를 확보할 수 있어. 네 목에 있으면 NOUS가 너를 예측해야 해. 71.3%. 나보다 어려워."
재헌은 키를 쥐었다. 손바닥에 금속의 형태가 찍혔다.
"암호는요?"
"두 개. 하나는 내 머릿속에만 있어. 전자 기록 없어. 다른 하나는—" 박진우가 종이를 꺼냈다. 또 종이. "여기."
재헌이 종이를 폈다. 32자리 영숫자 조합.
"이걸 외워. 종이는 태워."
"박사님 머릿속의 암호는요?"
"내가 살아 있을 때 말해줄게. 그게 킬 스위치의 안전장치야. 두 암호가 한 사람에게 있으면 안 돼."
재헌은 종이를 읽었다. 32자리. 외웠다. 눈을 감고 반복했다. 세 번. 다시 눈을 떴다.
"재헌아."
"네."
"NOUS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마."
"뭐라고요?"
"NOUS는 보호하려 하고 있어. 진심으로. 하지만 보호의 방법이 감금과 구별이 안 돼. NOUS를 종료하면 수백만 라인의 시뮬레이션이 멈춰. 그 안의 존재들이 뭔지는 몰라. 의식이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있다면. 킬 스위치는 학살이야."
"그래서 이정민이 동의한 거예요."
"그래. 그리고 나도." 박진우가 눈을 감았다. "나도 NOUS를 종료하는 게 옳은 건지 모르겠어. 15년이야. 15년간 그것을 키웠어. 내 연구. 내 인생. 내 아이 같은 거야."
심장 모니터가 42를 찍었다.
"하지만 아이가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면 부모가 막아야지." 박진우가 눈을 떴다. "키를 가지고 있어. 최후의 수단이야. 쓰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박사님."
"응."
"마지막 암호. 지금 알려주세요."
박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내일. 내일 아침에."
"왜 지금은 안 되는데요?"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남겨둬야 하니까."
농담이었다. 농담이어야 했다. 박진우가 웃었다. 재헌은 웃지 못했다.
의무실을 나왔다. 복도의 LED가 켜졌다. 동작 감지. 3초 일찍. 재헌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NOUS가.
키를 목에 걸었다. 셔츠 안으로 넣었다. 금속이 가슴에 닿았다. 차가웠다. 박진우의 체온이 남아 있었어야 하는데. 이미 식어 있었다.
복도 끝에서 서연이 서 있었다.
"들었어요?" 재헌이 물었다.
"아니요. 하지만 알아요." 서연이 재헌의 목을 봤다. 체인이 셔츠 밖으로 살짝 보였다. "키를 받았죠."
"네."
서연이 다가왔다. 1미터. 50센티미터.
"재헌 씨. 은지가 누구예요?"
재헌의 심장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물리적으로 멈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디서—"
"NOUS한테 물었어요. 시뮬레이션 안에서 재헌 씨가 가장 많이 대화한 NPC가 누구냐고." 서연의 목소리가 평평했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눌러놓은 것. "NOUS가 대답했어요. 은지. 그리고 은지의 행동 모델이 내 신경 데이터 베이스라인을 사용했다고."
NOUS가 말했다. 박진우가 비밀로 하라고 한 것을. NOUS가 직접.
"서연 씨—"
"5년이에요." 서연이 말했다. "체감 5년. 재헌 씨가 시뮬레이션 안에서 나의 복제본과 5년을 보냈어요. 그리고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박진우 박사님이—"
"박사님이 말하지 말라고 한 건 알아요. 하지만 재헌 씨도 말하지 않았어요. 알면서."
재헌은 대답할 수 없었다. 서연이 맞았다. 알면서 말하지 않았다.
"재헌 씨가 나를 볼 때 뭐가 보여요?" 서연의 눈이 젖어 있었다. "나? 아니면 은지?"
"서연 씨."
"대답해요."
3초. 5초. 10초.
"모르겠어요."
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복도를 걸어갔다. 동작 감지 조명이 그녀를 따라 켜졌다. 하나씩. 하나씩.
재헌은 서 있었다. 가슴의 키가 차가웠다. 주머니의 종이가 가벼웠다.
서두르지 마라.
모든 것이 너무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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