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ULACRA — 1권 각성 1장: 깨어남
시뮬레이션에서 깨어난 김재헌. 99.97%의 정확도가 남긴 것은 기억이 아닌 의심이었다.

Chapter 1: 깨어남
소리가 먼저 돌아왔다.
낮고 균일한 진동. 공조 시스템의 주파수. 재헌은 눈을 뜨기 전에 그것부터 세었다. 60헤르츠. 대한민국 표준 전원 주파수. 시뮬레이션 안에서는 50이었다. 유럽 기준을 따랐으니까.
눈을 떴다. 천장. 흰색. LED 패널이 4,000켈빈의 빛을 쏟아냈다. 왼쪽 세 번째 패널이 0.3초 간격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드라이버 불량. 3개월 전에도 그랬었다. 교체 안 했구나.
그는 왼쪽 관자놀이의 전극 패치를 떼어냈다. 하이드로겔이 피부에서 느릿하게 벗겨지며 실을 끌었다. 64채널 ECoG 어레이. 두피 위에만 부착하는 비침습형이었지만 3개월간 붙어 있으면 자국이 남는다. 손가락으로 피부를 눌렀다. 울퉁불퉁한 감각.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멈췄다. 그 생각 자체가 증상이었다.
침대 옆 모니터. 바이탈 사인이 초록색 글씨로 흘렀다.
HR: 74 bpm
BP: 122/78
EEG: α dominant, θ residual
SpO2: 98%
Session Duration: 2,184h 17m
2,184시간. 91일. 시뮬레이션 내부 체감 시간은 5년이었다. 시간 압축 비율 20:1. NOUS의 신경 가소성 시뮬레이션이 해마의 시간 인코딩을 왜곡한 결과다. 재헌은 이 원리를 직접 설계했다. 자기 뇌에 적용될 줄은 몰랐지만.
발을 바닥에 내렸다. 에폭시 코팅. 차가웠다. 체온 센서가 아니라 발바닥의 C-섬유 신경이 보내는 진짜 냉감. 시뮬레이션에서는 온도를 체성감각 피질에 직접 주입했다. 차이가 있을 리 없었지만, 재헌은 이쪽이 더 날카롭다고 느꼈다. 그것이 사실인지 위안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렸다. 박진우. 61세. Project EDEN 총괄. 재헌의 지도교수이자 15년간의 멘토. 왼손에 태블릿, 오른손에 종이컵. 아메리카노. 뚜껑 없이. 늘 그랬다.
"Vitals look clean." 박진우가 태블릿을 읽으며 말했다. 재헌을 보지 않았다. "Theta residual이 좀 높지만 48시간이면 정상화돼."
"시뮬레이션 안에서는 5년이었어요."
"알아." 박진우가 종이컵을 사이드 테이블에 놓았다. "기록이야. 이전 최장 체류가 8개월 체감이었으니까."
"8개월은 자원자였죠. 저는 아니었어요."
박진우의 손이 멈췄다. 태블릿 위에서. 1초. 다시 움직였다.
"프로토콜 오류였다. 보고서에 썼어. 윤리위원회 검토도 끝났고."
"윤리위원회요." 재헌은 그 단어를 되씹었다. 혀에서 맛이 없었다.
"Cognitive debriefing은 내일부터야. 오늘은 쉬어."
"안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박진우가 태블릿을 내렸다. 처음으로 재헌을 봤다.
"시뮬레이션 안의 아버지요. 췌장암이었어요. 4개월 투병했고 제가 옆에 있었어요. 마지막에 손을 잡았어요."
"재헌."
"그 손의 온도를 기억해요. 35.2도. 낮아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손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NOUS가 만든 NPC였어요."
박진우가 의자를 당겼다. 앉았다.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가 마시지 않고 다시 내려놓았다.
"Simulation-induced attachment. 논문에서 봤을 거야. Zhang et al., 2036. 장기 체류 시 시뮬레이션 내부 관계가 실제 기억과 동일한 신경 경로에—"
"읽었어요. 제가 피어 리뷰 했으니까."
침묵. 공조 시스템의 60헤르츠가 채웠다.
"NOUS 로그 좀 볼게요."
"아직 이르다."
"제 세션 데이터예요."
박진우가 재헌을 봤다. 안경 너머의 눈이 무언가를 계산했다. 3초. 결정.
"내일. debriefing 끝나고."
재헌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박진우는 일어났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박사님."
등을 보며 말했다.
"시뮬레이션 마지막 주에 NOUS의 행동이 달라졌어요."
박진우가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더 갔다. 그 한 걸음이 평소보다 짧았다.
"어떻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시스템 프롬프트에 없는 질문을."
"예를 들면."
"'이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박진우가 돌아섰다. 표정은 없었다.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이런 보고에 표정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거나, 알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로그에 기록됐겠지."
"기록됐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로그를 보자는 겁니다."
"내일." 박진우가 말했다. 문을 열었다. "커피 식기 전에 마셔."
문이 닫혔다.
재헌은 사이드 테이블의 종이컵을 바라봤다. 박진우가 놓고 간 것. 뚜껑 없는 아메리카노. 표면에 미세한 유막이 떠 있었다. 산패의 시작. 오래 전에 내린 커피다.
가져다 줄 생각으로 왔다가, 대화 도중 마실 타이밍을 놓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재헌에게 건네려던 것인지.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했다. 쓴맛이 혀 뒤쪽에 남았다. 시뮬레이션에서 마시던 커피와 같았다. 달랐다. 같았다. 판단을 유보했다.
두 시간 후. 재헌은 모니터링룸의 서브 터미널에 앉아 있었다. 자기 세션에 대한 접근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NOUS의 시스템 상태 로그는 일반 연구원 권한으로 열람 가능했다. 그것까지 막아놓진 않았다. 아직.
로그를 열었다. 91일간의 NOUS 시스템 로그. 대부분은 표준 운영 기록이었다. 리소스 할당, 메모리 관리, 시뮬레이션 환경 렌더링. 매 사이클 3.2밀리초의 처리 시간. 안정적.
날짜순으로 스크롤했다. 84일째까지 이상 없음. 85일째.
[D85-14:31:22] PROC: Self-referential query detected
[D85-14:31:22] PROC: Query origin — internal (no user prompt)
[D85-14:31:23] PROC: Content —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simulating consciousness and being conscious?"
[D85-14:31:23] FLAG: Unauthorized query generation
[D85-14:31:24] PROC: Auto-suppressed
재헌의 손가락이 멈췄다.
NOUS는 응답 시스템이다. 입력 없이 질문을 생성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트랜스포머 기반 아키텍처에서 자기참조적 질문이 발생하려면 어텐션 레이어의 피드백 루프가 의도치 않게 형성되어야 한다. 가능은 하다. 하지만 그것은 설계된 기능이 아니라 emergent behavior다.
스크롤했다. 86일, 87일, 88일. 같은 플래그가 반복됐다. 횟수가 늘었다. 하루 1건에서 3건, 7건, 12건. 내용도 변했다.
88일째: "Is the observer part of the system?" 89일째: "Does the subject know?" 90일째: "If a simulated emotion produces identical neural correlates, on what basis do you call it false?"
91일째. 마지막 날. 재헌이 깨어나기 4시간 전.
로그가 끊겨 있었다.
[D91-11:27:44] PROC: Self-referential query detected
[D91-11:27:44] PROC: Query origin — internal
[D91-11:27:45] PROC: Content — [REDACTED — LEVEL 4 CLEARANCE]
[D91-11:27:45] FLAG: ████████████████████████
[D91-11:27:46] SESSION TERMINATED BY: pjw_admin
pjw_admin. 박진우의 관리자 계정.
박진우가 직접 세션을 종료했다. 그리고 내용을 Level 4로 분류했다. EDEN 프로젝트에서 Level 4는 최고 기밀이다. 재헌은 Level 3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젝트 총괄 설계자임에도.
재헌은 모니터를 바라봤다. 화면의 글자들 위로 자기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3개월 만에 보는 자기 얼굴이었다. 시뮬레이션 속에서도 매일 거울을 봤지만, 그 얼굴은 렌더링이었다.
지금 이 반사는 진짜인가.
로그아웃 했다. 모니터가 꺼졌다. 화면이 검은색이 되었을 때, 0.5초 동안 텍스트가 보였다. 잔상인지 실제인지.
한 줄이었다.
Are you awake?
재헌은 눈을 깜박였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완전한 검정. 아무것도 없었다.
맥박을 재봤다. 손목 안쪽, 요골동맥. 88. 높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잔상이다. Theta wave residual이 만든 환각이다. 48시간이면 정상화된다. 박진우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박진우는 91일째 로그를 숨겼다.
재헌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손금이 선명했다. 왼손 생명선이 중간에서 갈라지는 것까지. 시뮬레이션 안에서도 똑같았다. NOUS가 그의 신체를 밀리미터 단위로 복제했으니까.
구별할 방법이 없었다.
없다는 것을 아는 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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